탄핵정국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자세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first of all)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 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 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1-4) 지금 우리가 알다시피 온통 사회적 이슈는 대통령 탄핵에 맞물려 있습니다. 방송이나 언론들이 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탄핵이 잘 되었는가? 아니면 잘못되었는가에 쏠려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방송은 탄핵 반대를 위한 의도를 지닌 내용들을 방송하고 있으며, 주요 언론 매체인 일부 신문들은 탄핵의 정당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거듭되는 ‘헌정초유’라는 요란한 선동적 언급에도 불구하 고 큰 동요없이 국민들이 자기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과거 고 박대통령 시해사건시에 온 국민이 두려워 했던 것에 비하면 그 동안 우리가 많이 발전해왔구나 하는 감사까지 드리게 됩니다. 우물이 탁해졌다가도 이내 맑아지는 것처럼 우리는 다소 어수선한 이 시기를 지낸 후에 또 다시 다른 고민들을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이 어수선함에 대한 치료가 막연한 기대로 남아 있지 않도록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 칩니다. 성경은 이 어수선한 시기가 속히 지나갈 것을 위해 우리가 기여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기여 해야 하는 이유는 한 정부가 친기독교적 성향을 지녔는가 여부에 관계없이 정부가 지상에서 하나님을 위한 대리자요, 사회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나온 것 이라고 성경이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골 1:16). 바울 사도는 심지어 자신들을 핍박하던 로마의 정부 관리조차도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기 위해 세우신 하나님의 대리인이라고 밝힐 정도로 정치 적 흐름이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고 있음을 밝힙니다.(Rom. 13:3-5). 물론 이 같은 언급을 모든 기독 인이 친정부 편에 서라는 말씀으로 오해해서는 안되겠지만, 정권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인식하여 가급 적이면 세워진 정부가 고요함과 안정을 위해 요구하는 질서를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이 같은 견지에서 볼 때 오늘 같은 어수선한 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기여할 수 있는 방식은 다름 아닌 교회적 차원에서의 간청과 기도와 탄원과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교회 가 지금 할 일은 선동이나 편가르기가 아닌 기도입니다. 교회는 나라를 위해 기도하며 위정자들을 위 해 기도합니다. 교회는 세 싸움에 동참하지 않습니다. 탄핵파, 탄핵반대파의 입장 어느 한쪽을 편들지 않습니다. 교회는 정치 지도자들이 그들의 세력 다툼을 버리고, 권모술수를 버리고 진심으로 국민들을 위한 정치를 펴서 이 땅에 고요하고 평안한 삶을 가져 올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교회가 할 일 은 정치 지도자 누구를 단상에서 거론하며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정치 권력의 서슬이 시퍼 렇게 살아 있을 때만큼이나 강단에서 누군가의 실정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교회적 차원의 기도의 구체적 대상은 다름 아닌 왕들과 권세를 잡은 자들 곧 정치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이 정치를 잘해 주기를 구하는 일차적 목표는 그 결과로 얻어지는 평안함과 조용한 삶 안에서의 성도 자신의 경건함과 존엄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의 궁극적 목적은 그 평안함과 고요함이 가능케 하 는 복음 전도입니다. 그것이 드려지는 기도와 간청과 탄원이 “모든 사람을 위한(1절 상반절)” 것일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하여 정치 경제 사회 전 분야에 소요가 아닌 안정과 평안이 있을 때에 비로 서,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영적인 것에 눈 돌릴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여러 번의 소동을 잠재우고 나서야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사회적 안녕이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매우 중요한 환경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행 21:39-40). 경제 불황과 같은 사회적 이슈가 사람들을 사로 잡을 때에 사람들은 소비를 줄입니다. 그 만큼 긴장하기 때문입니다. 전쟁과 테러와 같은 긴박함 가운데서 복음에 귀 기울이기를 기대하는 것 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 교회가 마치 정치에 대해 잠잠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공동체로서의 교회 의 서투른 말과 행위가 혹 나뉨을 조장하여 분노와 다툼을 일으키고 그 결과 마땅히 복음을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달되는 것이 방해를 받을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자신이 자연적으로 어느 편인가를 편들게 되는 성향을 넘어서 피아 둘 다의 유익을 위해 관원들을 위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라 요청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힘써야 하는 것은 어 느 한쪽을 편드는 것도 아니며, 분신하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니 우리는 관심을 끄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도이어야 합니다. 물론 교회 지도자는 사회 전반적인 문제를 논할 수 있습니다.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 을 욕되게 하기 때문입니다(잠 14:34).” 그러나 영적 지도자의 역할은 누구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내의 죄를 그 죄목대로 불러 내고 죄에 대해 사람들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혹 교회가 정부에 요구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정부가 기독교적 정책이나 법을 추구하게 하는 것 아닙 니다. 폭력과 소요와 범죄로부터 국민들을 지켜 안정을 도모해야만 하는, 하나님 세우신 정부 자체의 특별한 사명에 따라 그들로 진정한 정부가 되도록 천명하는 것입니다. 이 때 교회를 대변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 의도는 세상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예수 그리스 도 안에 불러내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반드시 유념해야 합니다. 성경은 정부에 대한 성도 개인의 사명은 혁명이 아니라, 개인의 삶 내에서 질서를 위해 정부가 정하 여 준 시민법을 성실히 준수하는 것이라 가르칩니다. 경건과 존엄(단정함)을 위한 고요하고 평안한 삶 을 위해 자신의 개인적 삶의 영역을 위한 책임을 잘 감당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바 울은 국세와 공세를 성실히 바칠 것을 들고 있습니다(롬 13:6-7). 그리고 정부가 세운 제도와 관리들 을 존경하라고 가르칩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우리가 행사할 수 있는 성경적 권리는 투표권이라 할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더 잘 살게 해 줄 것이냐 아니라, 누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그 권한을 맡겨 주신 것으로 이해하는데 가까 운 사람이냐 여부로 우리의 선택의 대상을 정하기 위해 정보를 잘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최 선의 방식일 것입니다. 언론이나 방송에 의해 의도된 정보로 인해 그것조차도 객관적인 것일 수 없기에 저 자신은 나타난 사 실, 가령 괌에 추락한 KAL기 잔해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은 사람의 명단 같은 것을 컴퓨터에 저장해 두고 있습니다. 훗날 누군가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가장 거룩한 판단을 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삶의 전 영역에 있어 도래하고 있는 주님 나라의 관점에서 오늘의 현상을 인식하여 의도된 정보에 의 해 선동되지 않고, 누군가의 편을 들지 아니하고, 단지 복음 전파를 위한 나라의 고요와 평안을 위해 지금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깊이 숙고하는 삶, 그것이 진정 기독인의 삶일 것입니다 일산소망교회 김희승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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