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교회의 시작 

대한예수교 장로회 금호교회는 한국이 일본제국의 쇠사슬에서 해방이 되고 얼마의(약4년) 세월이 지나고 북위 38도선을 중심으로 남북의 정권이 수립되고 남북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북한 공산정권하에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신자들과 우익진영의 사람들이 속속 월남을 하던 시절이다. 월남하다 붙들리면 시베리아로 끌려가기도 하고 탄광촌에 광부로 끌려가야 했다.

그래도 월남행렬은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 때 서울의 변두리 금호동에도 피난민들이 속속 몰려들었다.

그때는 금호동에 복개공사도 되기 전이요 거리복판으로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그 개울 남쪽 북쪽 할 것 없이 난민들의 판자집이 줄기차게 늘어섰고 흡사 미국서부 개척시대를 연상케 하는 거칠고 어두웠다.

그 때 상해(上海)임시정부 주석(主席)으로 계시는 김구(金九) 선생님께서 난민들을 위해서 판자집을 수백 칸 지으시고 난민들을 수용해 주시고, 학교에도 못가고 거리에서 떠도는 아동들을 위해 백범학원 까지 임시교실을 만들어 가르치도록 하셨다. 이렇게 난민들이 많이 모여드니 그중에서는 신자들도 있었다. 금호동에도 교회를 세우자는 소리는 많이 하였지만 엄두를 못냈다.

그 때 영락교회(그 당시는 베다니교회)에서 전도목사로 수고하시는 이응화 목사님께서 장충단과 금호동에 교회를 세우시려고 왕래하셨다. 그 노력은 주효해서 장충단에도 교회를 세우시고 금호동에도 1949년 2월 13일 주일에 백범학원 교실을 빌려 교우 13명이 예배를 드릴 때 선교부 전도영화도 갖고 다니시며 선교, 전도하시던 이무호 목사님이 동석하시어 처음으로 역사적인 예배를 드린 것이 금호교회의 시작이요 전능하신 하나님의 축복이시다.

장충단에는 처음부터 영락교회에서 유력하신 장로님(제분회사와 직조공장을 가지고 계신)께서 교인들을 꽤 많이 데리고 나오셔서 교회가 처음부터 자리를 옮게 잡으셨다. 할렐루야!

 전환기 

처음 예배를 시작할 때 참여하신 13명 중에 남아계시던 이명환 권사님은 1998년 9월 30일 90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 어렵게 시작된 교회는 날로 성장해서 300명이 넘는 교회로 늘어났고, 선교부에서 13만원을 받아다가 사택 13평과 교회 25평 건물을 천막으로 세웠다. 그리고 지금의 교회 위치로 가져올 수 있게 됐다. 그 때는 사택이 지금 교회 위치에 있고, 교회는 지금 교육관이 있는 곳에 도당집이었다.

피난민이 늘면 교인도 늘고 교회가 한창 치켜 올라갈 때 6.25 사변이 터졌다. 하나님의 심판이요, 인류에 대한 경고이셨다. 미국은 어리석게도 한국은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다고 했고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무력통일을 명했다. 한국은 유사이래 가장 큰 난리를 당했고, 그 당시 뉴욕타임지는 전쟁 중 가장 많은 화력이 동원된 전쟁이라고 했다. 교인들은 뿔뿔이 헤어지고, 교회도 당분간 공백기가 되어 버렸다. 1951년 1.4후퇴가 휘몰아치고 맥아더장군의 9.28진격이 시작된 후 서울도 회복이 되고 교인들도 모여오고 교회자리에 다시 천막을 치고 신학생들이 오가며 예배를 시작했다.

52년 봄 대구로 피난갔던 장로회 신학교가 다시 서울로 올라오고 신학생들 중에서 최지화 전도사님이 오시고 교회를 키워나가시게 되었다. 최지화 전도사님은 신학공부를 하시면서 교회도 열심히 보셨다. 그 때 선교사로서 무산 아동교육을 열심히 하신 분이 칸슬러(권세열)목사님 이라고 계셨는데 그 목사님께 부탁해서 성경 구락부도 열심히 하셨다. 그 때 구청으로부터 공민학교를 경영하면 정부보조도 약간 있고 학년 인정도 되니까 공민학교로 하자고 해서 53년 4월 1일부터 금호공민학교 설립인가를 구청으로부터 받았고 설립자는 최지화 전도사님으로 되었다. 교장은 수시로 변경할 수 있어도 설립자는 본인의 승낙 없이는 변경 할 수 없는 것이 법이다. 이 때문에 최지화 전도사님이 타지방으로 멀리 가신 후에도 설립자 변경 때문에 다소 어려움을 겪었다. 

1955년 중간에 고현봉 목사님께서 부임하셔서 공민학교 교장을 겸임하시고 공민학교 대지는 교회명의로 하고 교회대지는 고 목사님 명의로 하는 등, 행정 전반의 정리와 교회부흥에 전력하시어 많은 성장을 보게 되었다. 그 후 고현봉 목사님은 미국 유학의 길이 열려 미국으로 가시고 1959년말 조의택 목사님이 부임해 오시게 되어 교회는 계속 부흥되고 교회도 증축을 보게 되었다 (증축이라야 당시는 가건물을 한 두 칸 더 붙였다.)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교회는 일제말엽 신사참배 강요로 해서 용감히 싸우시다가 옥고를 치르시기도 하시고, 순교까지도 하신 어른들이 계셨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교회를 지키고 신학교도 경영해서 목회자양성도 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신 지도자들과 교회들도 상당수 많았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한국교회는 회개와 자숙으로 교회갱신과 혁신을 꾀하였으나 세월이 약간 흐르고 교회가 정돈되자 일제 때 지도자들이 또 다시 지도자의 자리에 앉게 되자(노회, 총회등에서)옥고를 치르신 분들과 지하교회를 지키신 분들과 이들을 업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교회를 따로하는 소동을 벌였다. 소위 복구파, 고려파 등으로 소란을 피웠고, 교단을 따로 만드는 일들을 했다. 

(1951년 35회 총회)그런 소용돌이 속에서도 교회는 크게 성장하고 교세는 40만을 넘게 되었다.

교회가 소강상태에 이르렀을 때(1953년 제38회 총회) 기장(기독교장로회)이 분립되었다. 그 이유는 조선신학(현재는 한국신학대학)학장이시던 김재준 교수의 신학이론이 문제라고 해서 (사실은 교권과 지역감정 때문)기독교 장로회(소위 기장)가 분립되었다. 그리고 6년의 세월이 흘러간 44회 총회에서(1959년) 표면상 경기노회 총대문제로 또 다른면은 박형용 박사의 신학교 대지문제(당시 3,000만원)가 겹쳐 지역감정 등이 합동측과 통합측이 분립되는 쓰라린 역사가 현실화 되고 말았다.

이런 파동과 소용돌이는 위에 있는 총회나 노회에만 분쟁과 손상을 가져온 것이 아니고 지방으로도 확산되어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분쟁과 법원투쟁 등을 벌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말할 수 없는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필자(김성억 원로목사)는 그 때 영남지역에서 미력이나마 노회와 총회화합에 진력하였다. 그것이 인정되어서 인지는 몰라도 노회장 2회, 총회회록 서기 4년, 부서기 2년, 총회임원을 6년간 계속했고, 정치부장, 헌법위원장, 헌법해적서 제정위원장, 규칙부장 6년을 계속 봉사했다. 이런 관계로 해서인지는 몰라도 서울로 다시 올라오게 되었다. 서울로 다시 올라와서 용산동에 있는 신흥교회를 건축하고 금호동에 또 할 일이 있다고 해서 금호교회로 부임했다.

총회가 분립되고(합동측과 통합측) 노회가 소란할 때 조의택 목사님은 고생을 많이 하시고 금호동 남부교회로 나가시고 1963년 김용수 목사님이 오셔서 교세도 늘고(500여명으로) 모든 것이 정리 되었으나, 재산문제는 법원에 계류되어 있었다.

김용수 목사님은 법정 투쟁에서 많은 고생도 하셨지만 법원은 결국 교회재산은 교인들의 헌금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반분해서 가지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 당시 많은 판례가 그러했다.) 당시 교회재산은 교회대지와 공민학교 부지였는데, 학교 부지를 남북으로 측량해서 반분하고 교회대지는 반분할 수 없기 때문에 현금으로 계산해서 2,000만원이 된다고 공증이 되어 1,000만원을 주고 남부교회와 완전타협이 되었다고 한다(김용수 목사님 진술). 김용수 목사님은 피고로 법정에 서시기도 하시고 교회분립에나 법원소송에 있어서나 말로 다할 수 없는 수고를 많이 하셨다. 때문에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상급 많이 받으시고 주님의 칭찬을 들으시리라 확신한다.

 단합성장기 

교회가 어려워진 1967년 상반기에 김성억 목사님이 부임해 오셨다. 김 목사님은 부임하시기 전에 예배지식을 얻기 위해 기도로 준비하시기도 하시고, 여러면으로 연구도 해보셨다. 그리고 일의 순서와 진행을 차례로 계획을 세우셨다.

첫째로 대단한 단합이다.

흩어진 교우들을 모으는 것과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여 사명감에 불타는 사람들로 만들고 전진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시고, 기도로 준비하며 매일같이 열심히 심방하고, 해이해진 신앙과 교회를 사랑하는 믿음을 키워나갔다. 주님의 사랑은 상처받은 마음과 해이해진 신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셨다. 교회를 떠났던 교우들도 모여들고 상처받았던 심령들이 위로받고 통회하며 교회를 사랑하는 믿음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성도들이 모여들고 새로운 신자도 달마다 불어서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성도가 줄을 잇고 금요철야 기도회에 나오는 성도들이 늘어났다. 교회는 기도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희망이 있는 것이다. 주님이 같이 하시기 때문이다.

둘째로 새로운 소망을 주는 일이다.

1960년대를 전후해서 금호동에는 판자집이 약 40%정도 이고, 판자집도 없어서 판자집에 세들어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그 상황을 살피신 김 목사님은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해 소규모라도 교회 전속 아파트를 지어서 교인들 후생에 다소라도 도움을 주었으면 하는 생각에 당시 교회대지가 한쪽으로 경사가 져서 아카시아 나무만 무성하고 공터진 곳에 언덕을 깎고 3층 아파트를 지으면 땅도 얻고 집도 얻고 지붕은 평면으로 하면 운동장도 쓸 수 있다는 일석삼조가 되는 설계를 해서 교회 본당 자리에는 고등공민학교를 세우고, 교회 본당은 목사관이 있던 자리에 세우고 사택은 아파트 3층에다 목사관, 부목사관, 전도사관, 사찰실 등을 합쳐서 사택센터로 쓰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결론을 세우고 건축위원회를 구성했다. 건축위원장 백원일장로(별세), 부위원장 홍광주 장로, 서기 이광선장로, 회계 이성제 장로님으로 하고 그 외 위원 6명을 선출했다. 김 목사님은 고문으로 했다. 이런저런 준비를 하다보디 1967년이 다 지나가고 1968년부터 본격적인 건축이 진행되었다. 건축위원회는 경쟁 입찰로 몇 몇 건축업자들과 상의했으나, 입찰추첨결과 동아건설의 송 사장에게 낙찰되었다.

처음 계약은 아파트 1층, 2층, 3층에 대한 계약이었는데, 건축허가는 244평이었다. 건축하다 보니 추가 평수가 들어 260평 준공을 했고, 송사장님 앞날에도 번영을 빌었다. 

두 번째 건축은 교회 본당이다. 본래 건물이 도당집 이었고 건평은 50평이었다. 그 갑절은 해야 된다고 본당 건평 100평으로 하고, 종각은 4층, 본당 2층도 100평이고, 모자실(3층) 30평 종각지하 5평, 4층 5평을 합치면 240평이다. 본당 건축은 동성건설의 최 사장이 맡아 해주셨고, 감독은 양승표 장로님이 해주셨고, 당국의 교섭이나 이웃간의 문제 등은 (공사 중에 술먹고 야로하는 등) 이광선 장로님이 처리 해 주셨다.

세 번째 건축은 고등공민학교 교사건축이다. 재력이 없어서 건평70평 2층이면 140평이다. 교실 한칸을 20평으로 하고 (정규규칙은 25평이지만) 7개 교실을 만들어 1학년 3개학급, 2학년 3개학급, 3학년 2개학급으로 해서 1970년 말에 문교부로부터 고등 공민학교 인가를 받았다. 학교재단은 학교대지와 교회대지, 교회아파트대지와 아파트 건물(1층,2층,3층)을 학교 재단으로 해서 학교재단 법인을 구성하고 당국의 인가를 받았다. 고등공민학교로서 재단을 가지고 있는 학교는 당시 서울 시내(서울교육청) 2개처 밖에 없었다.(그중 하나가 우리 학교이다) 학교 직원은 12인이고 학생은(인가당시) 420명이었다. 건축은 주로 동아건설 최 사장이 해 주셨고, 감독은 조원준 장로님 이셨고 학교 이사회 이사장은 김 목사님 이셨고, 서기는 이광선 장로님이 수고하셨으며, 이사는 7인 이었다.

모든 건축이 1970년 10월까지 완료되어 역사적인 헌당식과 낙성식, 준공식을 온 교우와 노회와 교육당국(구청 교무과장)까지 참석해서 1970년 11월 11일 11시 성대히 거행했다. 이날은 금호교회의 한 획을 이룬 날 이요, 성장의 한 단계 이며 세계 평화 기념(11.11.11)을 의미 깊게 한 날이기도 했다. 여기서 한 가지 특기할 일은 세 가지 건축(아파트, 학교, 교회)의 총액이 당시금액으로 2,800만원이 들었다는 사실이다. 교인들의 생활은 거의 피난민이고 그 만한 금액을 마련할 형편이 못되었다. 그 내역을 약간 설명하면 1,300만원은 학교부지 530평을 매각한 것이고, 1,000원은 교회가 어려운 중에도 4년간 헌금해서 모은 돈이다. 할렐루야! 처음부터 땅을 팔아 돈을 만들어 놓고 시작한 것이 아니요, 공사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보는 사람들이 그 땅을 팔아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땅을 사려는 사람이 없다. 김 목사님이 그래도 어디 빚을 얻어다(고려합성, 무궁화유지) 급한 것을 막아가면서 참 고생을 많이 하셨다. 목사가 무슨 돈이 있다고 돈을 빌려 주시는지 고마우신 분들이었다. 

기독교의 선교방침에는 삼대원칙이 있다.
첫째, 직접 전도해서 개척교회를 세우는 일이다. 선교사들도 그렇게 했다.
둘째, 교육기관(학교)을 세워서 인재를 양성하며 선교를 하는 것이다.
셋째, 의료기관(병원)을 설립해서 육신의 병을 고쳐주며 선교하는 것이다.

초대 선교사들이 우리 땅에 와서도 대부분 그렇게 했다. 교회도 세웠고, 학교를 설립해서 (예:연희대학, 숭실대학, 세브란스 의과대학 등) 많은 인재를 양성했고 문맹퇴치에 공헌했다. 의료기관을 세워서 크게 공헌했다. 예)서울:세브란스 의과대학과 종합병원, 평양:숭실대학교와 기독병원 전국에 주요도시에 학교와 병원을 세웠다. 선천, 함흥, 원산, 부산, 전주, 안동, 청주, 대전 등 금호교회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교회가 성장해서 힘이 생기게 되니 먼저 성경 구락부로 시작해서 공민학교(초등학교 수준), 고등공민학교(중등학교 수준) 반석 성서학원(선교사들이 하던 고등성경학교 수준)등을 운영하고 (3개년졸업) 서민복지 운동으로는 교회 아파트를 설립해서 입주자의 1/3은 불신자로해서 신자를 만드는 접전도도 실시했다. 10년이 지나자 교회가 성장하면서 유치원등을 운영하게 되고 교역자를 여러분 모시게 되니 사택도 여려채가 필요했다. 부득이 아파트 입주자들을 내보내고 부목사님 사택 전도사님 사택동으로 사용하게 됐다. 세월은 쉬지 않고 흘러서 당회장(김성억)목사님의 정년이 된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은 목사가 만70세가 되면 정년 은퇴하게 되어있다.) 때문에 1986년 12월 28일 김성억 목사님의 원로추대와 퇴임이 있었다. 후임 목사님을 모시는데 일 년이 지났다. 1988년 1월 3일 도성찬 목사님이 부임하셨다. 도 목사님이 부임하신 후 교회종각도 울리고 개척교회도 여러 곳 하셨고 미자립 교회 원조를 30교회나 하셨다. 교회가 양으로 질로 향상하고 부흥의 역사가 힘차게 일어나던 중 도 목사님이 병을 얻으신 것이다.(병원 측 말로는 간이 나쁘다고 했다.) 치료도 많이 하시고 약도 많이 쓰셨지만, 1996년 2월 23일 소천 하였다. 8년간을 충성을 다해서 목회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생명의 면류관을 주셨다고 확신한다. 후임을 이화영 목사님을 모셨는데 이 목사님은 최고학부를 나오시고, 본교단의 장로회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셨고 현재 아세아연합 신학대학원(미국, 플러 신학대학원과 공영하는)에 학위전공을 계속하시는 중이며 불원간 학위를 취득하시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