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받는 기도
[현대인의 굶주림]이라는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김선겸 집사님)
“현대인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물질적인 풍요의 시대를 누리고 있으나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서로 소외를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그 소외의 밑바닥에는 진정한 만남에 대한 굶주림이 있다”
4 가지의 굶주림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 현대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껏 털어놓을 수 있는 진정한 이웃이 없기 때문에 대화의 굶주림(talking hungry)을 느낀다.
(강안석 안수 집사님)
둘째, 현대인은 다른 사람의 따스한 손길이 자기에게 와서 닿기를 원하는 접촉에 대한 굶주림(touching hungry)을 느낀다.
셋째, 현대인은 가장 개방된 시대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 사랑에 대한 굶주림(love hungry)을 느낀다.
넷째, 현대인은 진정한 만남에 대한 굶주림을 느낀다. 고 했습니다.
(박노준 집사님)
우리는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것을 듣고, 많은 말을 하지만 늘 뭔가 허전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이양순 A . 이양순 B 집사님)
이유가 무엇일까? 원인은 진정한 만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김병헌 집사님)
만남은 진정한 대화의 삶을 통해 가능합니다. 마음속에 있는 비밀을 털어놓으며 서로 간에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때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김병간 집사님)
이런 면에서 기도가 무엇인가?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기도는 혼자만의 독백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매월 끝 주일은 사랑의 봉사주일입니다.)
대화는 인격적인 대상들끼리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의 인격이십니다. 우리를 만나 주시고 우리에게 참된 대화를 요청하시는 분입니다. 이 대화에서 하나님은 대화의 주체시면서 또한 객체이십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한 사랑의 손길함이 본당 . 승강기 앞에...)
하나님께서 대화의 주체이며 객체가 된다는 것은 대화의 동기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대화의 상대가 되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존 낙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고통을 아시며 그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도우시기를 원하시며 또한 우리의 감사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하나님과의 진지하고 친밀한 대화다”
존 칼빈 “기도는 하나님과 경건한 사람들 사이의 친밀한 만남이다”
“도널드 블러쉬 “기도는 교제나 연합보다 더 구체적인 어떤 것인데 그것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상호 의사전달이다”
묵상이 말없는 하나님과의 교제라면 기도는 말이 있는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를 보십니다. 그의 기도의 모습이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삼상 1:13)
그는 마음속으로만 기도를 드리고 있었기 때문에 입술만 움직이고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비록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 말이 있는 기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전 14:15절에서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겠다” 고 한 것과 같은 기도입니다.
우리는 예례미아의 기도에서 대화로서의 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렘 12:1) 하나님과의 대화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들으려고 하는데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 에스겔은 하나님과의 대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람아 일어서라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그가 나에게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영이 내 속으로 들어와서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그가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계속 듣고 있었다”(겔 2:1-2 표준새번역)
(소망 찬양대)
함께 하시겠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다”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 이런 기도생활에서 일어나는 피할 수 없는 의문이 있습니다. 이것은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에 대한 의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가? 경우에 따라서 도움을 요청하는 우리의 부르짖음에 귀를 막으시는 것은 아닌가? 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이 적을지라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사실은 믿음의 기도와 순수한 간구는 하나님이 더욱더 기쁘게 들어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 10장에 응답받는 기도의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맹인이었고 거지였습니다. 그러나 순수하고 간절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첫째,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구원자) 으로 믿은 순수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간절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셋째, 사람들이 꾸짖고 말려도 더 힘써 예수님을 찾는 열정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더욱 소리 질러”
결국 이 믿음이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믿음으로 드리는 간절한 기도를 기쁘게 들어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의 모든 기도를 항상 들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기도의 대상이 잘못되었을 때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갈멜산에서 바알의 제사장들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기도의 대상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이름이 훼방을 받거나 죄를 범했을 때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다음의 말씀을 보십니다.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로 가득함이니라”(사 1:15)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1-2)
(3대가 한자리에... / 한재석 권사 . 정규태 집사와 딸)
셋째, 형제 및 자매와 불화할 때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2-26)
요한 웨슬레는 “당신이 모든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당신의 기도가 하나님의 무게로 달려질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넷째, 의심하는 사람의 기도에도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마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주께 얻기를 생가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6-8)
루터는 “우리의 기도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확신과 믿음을 시험해야 한다. 그와 같은 방법에서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드려질 것인지 의심하지 않게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서 꼭 받으시는 기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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