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실미도”가 관객동원에서 꿈의 자리수인 1,000만을 거침없이 돌파하였고, 얼마 전에 개봉된 “태극기 휘날리며”는 사상 최고의 예매율을 기록하며 실미도의 기록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두 영 화 모두 지나간 세월의 잔재로만 여겨졌던 이데올로기를 소재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큰 반향 을 일으킨 것은 뜻밖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나라도 이 정도의 스펙타 클한 영화를 제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견스럽다는 느낌까지 들게 합니다. 그러나 이 영화들에 대한 미디어의 보도내용을 전제로 보면, 두 영화는 어떤 면에서 애국심의 의미 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상황보다는 해석을 우선시하는 작금의 경향은 어 쩔 수 없는 것이라 해도 영화속에 나타난 이데올로기의 희극화와 너무도 가볍게 그려지고 있는 국가 에 대한 존엄은 그냥 지나치기에는 손상된 균형감각의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만일 이데올로기의 선 택이 일순간의 분노의 감정 때문에 바뀌어 질 수 있는 것이라면, 또한 애국심이 개인의 이해관계에 제압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의미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애국심의 개념이 시대적 상황에 따라 탈색되고, 한때는 접촉하는 모든것을 칼날처럼 베어 냈던 이데올로기가 흔적조차 희미해지고 있는 이 시대에 기독교인의 나라사랑은 어디에서 원동력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기독교인의 사회와 국가에 대한 무한책임의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기 독교인은 사회와 국가의 실패에 대한 무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독교인의 사명은 사회의 빛과 소금입니다. 사회와 국가의 실패는 기독교인의 빛과 소금의 역할이 실패했다는 것을 의 미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의 나라사랑은 성경에 나타난 중요한 뼈대 중의 하나입니다. 북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망 할 때 이사야의 눈물이 있었고,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할 때 예레미야의 눈물이 있었습니다. 예레 미야는 망해가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안타까움과 애타는 심정으로 인해 주야를 눈물로 채웠습니다. 민족이 자랑스러울 때에는 환희를 느끼고, 부끄러울 때에는 울분을 드러내기는 쉽지만, 그 순간 국 가를 위해 눈물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소수의 사람들뿐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인의 진정한 나라사랑은 격동된 감정에서 나오는 몸짓도 아니고, 냉소적인 방관 도 아닙니다. 기독교인의 나라사랑은 무릎에서 나오고, 그 시작은 이웃울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목숨을 바치는 거창한 것은 아니라 해도 신호등을 잘 지키고, 거리의 휴지 를 줍고, 이웃사람과 웃으며 인사를 나누는 것 자체가 큰 애국심의 시작입니다. 나라사랑의 길은 멀 리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아픈 자, 가난한 자, 사회에서 소외당한 자를 찾아가는 것이 진정으 로 나라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작은 일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나라사랑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의 주 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채모세군이 군에 가는 날입니다. 잘 다녀오도록 기도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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