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지금도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을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계신다.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봉사하고 있지만 아직 주님을 만나지 못한 분들, 신앙생활은 하면서도 술과 담배를 끊지 못한 분들, 아직도 기제사와 명절제사를 우리 전통제례에 맞게 지내고 있는 분들, 마음으로는 교회에 나가고 싶지만 여러가지 여건 때문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분들, 진정한 사랑을 회복하지 못한 채 항상 갈등 중에 있는 부부들…. 그럼 나는 어떠한가. 매사에 술로만 해결하려 들고 가부장적인 의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어 진정한 부부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다. 또 아이들에게는 권위적인 아버지였고 대화도 없었다. 가정은 해체 위기에까지 몰렸다. 나 역시 깊은 수렁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이런 나를 건져내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나는 몰락한 조선 양반가의 후손으로 1964년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에서 종가집 7대 종손으로 태어났다. 다섯살 때 아버지로부터 제사 지내는 법을 배우고 기타 예법을 익혔지만 몰락한 양반 가문의 상징인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던 가난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아버지는 나름대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도시인 부산으로 이주하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평소 건강하시던 어머니는 갑자기 원인 모를 중병에 걸리기도 했다. 어머니를 모시고 용하다는 병원과 약국을 찾아다녔지만 허사였다. 급기야 토속적인 치료 방법을 택하기도 했지만 어찌 그런 방법으로 병이 낫겠는가. 이런 암울한 가정환경 속에서도 한가지 희망이 있었다면, 내가 학업성적이 우수해 동네 사람들로 부터 장래가 촉망된다는 말을 자주 들었던 것이다. 나는 환경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악물고 공부에 전념했다. 덕분에 고시 합격자가 많이 배출된다는 성균관대 법학과에 4년 장학생으로 입학 하게 되었다. 난 강직한 검사가 되어 검찰총장이 되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었다. 하지만 그 꿈은 대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자꾸 멀어져만 갔다. 술꾼의 자손이어서 그런지 술을 입에 댔다 하면 새벽까지 퍼먹어야만 양이 차서 잠을 이룰 수 있었다. 이런 습관은 결혼 후에도 이어졌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육군 석사정훈장교로 임관한 나는 지인의 소개로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누구나처럼 우리 부부도 신혼 초에는 잉꼬부부 소리를 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부부싸움이 잦아졌다. 술 마시는 남편,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는 남편, 자녀들에게 무관심한 아버지…. 가장 가까운 내 가족마저도 사랑할 줄 모르는 그런 메마른 사람이었다. 군 제대 후 6개월간 다니던 증권회사에 사표를 내고 대학원 박사과정에 복학한 뒤 꿈에 그리던 미국 시애틀 로스쿨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아마도 하나님은 그 때부터 나를 구원하시려고 밑그림을 그리고 계셨던 것 같다. 나는 시애틀에서 하나님을 극적으로 만났다. 그 은혜를 체험하자 나는 달라졌다. 아내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됐고 그의 영혼을 사랑하는 방법도 터득하게 되었다. 가정에서는 나 때문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하나님을 만나면, 자신부터 아름답게 변화되는 것을 바로 실감할 것이다. 가정에 기쁨을 주고 이웃들에게 사랑을 퍼주는 그런 모습, 매사에 성경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그런 진지함을 맛보게 될 것이다. 나는 이렇게 나를 변화시킨 능력있는 분의 은혜를 함께 나누고 싶다. 온갖 허물로 가득했던 과거 속 나처럼 힘들어하고 지친 영혼들,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정말 나를 변화시킨 하나님은 참으로 오묘하신 분이다. ◇ 필자 김형남 1964년 경남 함양군 수동면 출생, 성균관대 졸업, 미국 헌법연구소 선임연구원, 워싱턴주립대 로스쿨 초청연구원 및 객원교수, 캐나다 브리티시 콜롬비아대 로스쿨 교환교수, 사법시험 출제 및 선정위원, 행정자치부 시험위원, 중앙인사위원회 출제위원 및 면접위원, 한국헌법학회 이사, 현재 경성대학교 법정대학 부학장·법학과 교수, 부산 해운대 소명교회 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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