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며 성장한 제 조카(정재욱)가 뉴욕에서 저희 교회 홈페이지 에 들어와 우연히 마태복음 10장5절에 대한 제글을 보고, 자신의 생각을 메일로 보내왔습니다. 제 조카지만 금호교회에서 저보다 성숙한 신앙인이됨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정재욱의 글입니다) 삼촌, 건강하신지요. 남모르게 삼촌의 영성에 대해 걱정하고 기도하고 있었는데, 오늘 한시름을 놓았습니다. 삼촌께서 금호교회 홈페이지에 올리신 질문을 보고, 삼촌이 옳은 방향으로 영적성장이 이루어 짐을 보았습니다. 제가 금호교회 목사님에 대해 아는바가 없어서, 혹시나 율법적인 목사님이면 어쩌나, 자유롭게 하고 생명을 끼치는 목사님이 아니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신사적이었던 베뢰아 사람들 처럼 '정말 그러한지 상고'하는 모습을 보고, 일단 한시름 놓게 되고, 예전의 삼촌 모습과 비교해보며 새삼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이 감사해집니다. 김목사님과 삼촌께서 쓰신 10장 5절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서 저도 몇가지를 묵상해 보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함께 나누면 좋을듯 해서 이메일을 드립니다. 혹시라도 함께 토의해 보고 싶으신 말씀들이 계시면, 이메일을 주세요. 함께 묵상해 보고 나누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 화자인 예수님과 청자인 제자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저자의 입장이 되어 묵상을 하면 보다 넓은 시야를 확보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의 이해: 예수님은 이 말씀을 앞구절에 연이어서 하셨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그리고 바로 열두제자를 부르셔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며 내어 보내십니다. 이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문제의 구절인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입니다. 삼촌께서 제대로 짚으신 것은 이런 말씀을 우리는 항상 '당연하고 지당하신 말씀'으로 받고 의문을 갖지 않는 다는 점입니다. 당연히 삼촌처럼 의문을 가져야 하고, 질문을 가져야 하는 대목이라 여겨집니다. 막상 예수님의 입장이 되어 보면, 예수님이 상당히 '이중적' 이라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지금 본문 뿐 아니라, 복음서의 몇몇 곳에서도 보듯이 이방인에 대해 상당히 '홀대' 하셨습니다. 그런데, 각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과 사도행전에 가보면, 또 그렇게 이방인에 대해 열심을 품고 계십니다. 이건 참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께서 이방인을 홀대 하신 예를 들면, 마15: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거의 저주 수준입니다. 그런데 또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예수께서 사마리아의 한 동네에 들어가셔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4복음서 '최초'로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스스로 밝히는 건 또 어찌 된 일입니까??? 이때 제자들은 돌아와서(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자와 말씀하시기 전에 먹을것을 사러 갔습니다.)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을 나누고 계시는 것 자체에 대해 의아해 했다고 합니다. (요 4:27) 한가지 중요한 힌트가 여기서 나옵니다. 예수님이 이상하게도 유대인이 없을때는 이방인들에게 잘대해주시고, 유대인들이 함께 있을때는 홀대했다가도 유대인들도 인정할만한 수준의 태도를 보이는 이방인에 대해서 '이야~ 이스라엘에도 이런 믿음은 없구나!' 하면서 고쳐줍니다. 그것도 혼자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아주 기이히 여기면서 주위 사람들이 다 알아듣게 말하십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감히 말을 못합니다. 마 15:26의 말씀은 공관복음에서 딱 한군데 마가복음에 나오는데 한가지 단어가 추가되어 있어 우리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마7:28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먼저'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로 보건데 예수님은 분명히 사마리아 뿐 아니라 이방에게도 관심과 사랑이 있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후 제자들에게 명하셨듯이 원대한 계획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죽임당하시기 전까지의 사역은 유대에 촛점을 맞추셨습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의 이해: 우리가 제자중 하나가 되어 이때의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가정하고 눈을 감고 음미해 볼 필요가 있는 듯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 이방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의 고을로도 가지 말고,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양에게 가라!" 유대인 제자로서 느끼는 첫번째 감정은 '희열'임에 분명합니다. 메시아로서 드러내신다는 뜻입니다. 귀신을 쫓고, 병든자를 고치고 약한자를 일으켜 주는 것은 분명 메시아로서의 징표입니다. 곧 이스라엘이 회복되리라는 기대도 커집니다. 그러나 두번째로 우리의 뇌리에 파고드는 것은 '의아함'입니다. 어차피 예수님이 저런 말씀을 하지 않아도, 유대인으로서 이방으로나 사마리아의 도시(영어성경은 city로 되어 있고, 새번역표준도 도시로 되어 있습니다.)에는 '당연히' 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현재의 우리가 다른 나라에 선교도 하고 아프리카나 중국에 선교도 하니, 당연히 예수께서 저런 말씀을 안하시면 사마리아 나 이방에도 가서 예수님께서 주신 권능을 베풀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이때의 제자들은 100%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으로서 사고합니다. 유대인은 절대 어쩔수 없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과 상종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이 부분을 언급을 합니다. 그냥 흘러들을수도 있겠지만, 좀더 제자의 입장이 된다면 큰삼촌처럼 의문을 갖게 됨은 당연합니다. 분명히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하신 것임에 틀림 없는 말씀입니다. 그얘긴 누구더러 들으라는 말씀임에 틀림 없습니다. 저자의 입장에서의 이해: 마태는 마태복음을 100% 유대인을 위해 썼습니다. 유대인에게 '유대의 왕, 즉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이 글을 썼습니다. 유독 4복음서에서 마태복음에만 10:5절 말씀이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이 구절이 없습니다. 즉,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특별히 주신 말씀이라는 뜻도 됩니다. 우리가 마태의 입장이 되어서 글을 쓴다고 가정해보면, 수많은 예수님의 말씀들 가운데서 이 대목은 이 글을 보는 사람인 유대인을 위해선 절대로 빼먹으면 안되는 구절이 된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어떻게까지 유대인의 구원자로 오셨던가를 보여주는 책에서는 절대로 빠져서는 안될 구절이라는 얘기가 됩니다. 위의 세가지 입장과 이해를 종합해 볼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중점을 둔 사역은 이스라엘의 회복임을 알수 있습니다. 실재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시며 어미닭이 병아리를 모으듯 품으려 한적이 몇번이냐며 애통해 하신적도 있습니다. 또한 옛 선지서의 언약처럼 이스라엘의 구원인 메시아로서 예수님을 드러내셨습니다. 그것을 마태는 말하고 싶어했고, 예수님도 그점을 항상 부각시키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의 잠시 넘어짐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방에 이르고 이방의 부요함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말하길 로마서 11:11-12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만일 이스라엘이 넘어지지 않았다면 그 풍요와 끼치는 영향이 더 컸으리라는 성경의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오순절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볼까 합니다. 아직 성령이 저들에게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께서 저들을 이방에게 보내지 않았다는 것은 얼핏 보면 옳습니다만 몇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마태복음 28장18절-20절 에서,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 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와 같이 명하시지고 사도행전에서는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라고 하십니다. 두 말씀에게 공히 드러나는 명령은 내 증인이 되라, 즉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며, 분부한 모든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이지 마10:5이후 말씀처럼 귀신을 쫓고, 병든자와 약한자를 일으키고 ,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영어성경에는 at hands 손안에 있다) 라고 선포하라는 것과는 내용이 다릅니다. 즉 마10:5은 메시아가 오신것을 선포하라는 것인데, 누구에게 하라는 것이냐면 이스라엘에게 하라!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오늘날 너희에게 이루어졌다! 라는 것을 이스라엘 모두에게 알려라 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데,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언제 우리한테 오셨던가요? 이방에 먼저 가셨지.." 라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저희로 핑계치 못하게 합니다. 또 이문제를 오순절을 주된 key로 생각하고 풀게되면 한가지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이 마치 성령님의 권능이 예수님의 권능보다 크다, 내지는 예수님의 권능이 성령님의 권능보다 약하다 라고 얘기 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할 가능성이 생깁니다. 마태복음 말씀에선 분명히 제자들에게 병고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권능'을 "예수님께서" 주셨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오순절사건을 key 로 생각하고 풀게 되면 사실 너무 안일한 해석이 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제 개인적으론 이 구절의 주요 key를 마태라는 저자와 마태복음의 저작이유에 두었습니다. 즉 유대인을 주된 key로 삼고 묵상했습니다. 결론: 마 10:5 말씀은 마태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어떻게 까지 이스라엘을 위해 메시아로서 충실하셨던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가 글을 쓸 당시만해도 기독교가 마치 이방인 사이에서 유행하는 유대교 이단쯤으로 취급 받았던 시기였음을 감안한다면, 이 짧은 한 구절이 가지는 힘은 매우 큽니다. 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약속하신 메시아라는 것이 더욱더 분명해 지게 하고, 유대인들과 세상 모든 이로 하여금 핑계치 못하게 하는 힘이 있는 말씀입니다. 기타: 성령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위해선 박영선 목사님의 '성령론' (크리스챤서적) / 5000원 대천덕 신부님의 '산골자기에서 외치는 소리2 : 성령론2' / 6000원 R.A. Torrey 목사님의 '성령론 (대천덕 역)' / 4500원 켐벨 몰간의 성령론 등이 매우 좋은 책입니다. 특히 박영선 목사님의 성령론을 추천해 드립니다. 몇일 전 저도 처음 읽어보았는데, 삼위일체론에 대한 매우 명확한 해석이 돋보입니다. 나눔속에 더 풍성한 은혜가 있길 구합니다. 두서없이 써서 의미 전달이 명확히 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습니다만, 삼촌과 말씀에 대해 서로 나누고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즐겁기만 합니다. 그럼 건강하시고요, 다음에 저도 질문이 생기고 묵상할 것이 생기면 삼촌께 이메일 해서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뉴욕에서 재욱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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