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을 남기려는가? 많은 분들이... 송보물 권사님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그가 남긴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자기만 위해 살다가 죽었다면 아무리 그가 권사의 직분을 가졌다 할지라도 지금쯤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사랑의 수고와 믿음의 헌신이 있기에 오늘까지... 두고두고 이야기하고 모든 사람들 기억 속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 2003년 8월 10일 대화광장에서...- 송보물(宋保物)권사님... 송보물(宋保物)권사님은 우리 교회 건축에 전 재산을 바치신 분이다. 그 어른을 기억하시는분이 지금은 많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세월도 흘렸지만 자손이 없는 때문이다. 그 어른은 1901년 7월 28일 평남 개천에서 출생하셨다고 1967년 가을 심방때 신상카드에 적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향에서 결혼하시고 젊어서 평양에 나와 사시면서 처음 신자가 되셨단다. 6.25때 피난 행렬에는 조카들 몇사람과 같이 서울에 왔으나 조카들과도 헤어지고 독신으로 금호동 김구 주택 한칸에 그 몸을 담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금호교회를 아버지의 집으로 생각하며 신앙생활만이 유일한 기쁨이였다. 그러던중 1969년 교회를 새로 건축하면서 돈이 없어 쩔쩔매는 것을 아신 권사님은 자기집(김구주택한칸)10평밖에 안되는 재산이지만 그것을 교회에 바치시기로 결정하시고 건축위원회에 말씀하셨다. 건축위원장(백원일 장로님)은 제직회에 그 뜻을 전달하고 제직회가 받기로 의결하였다. 당시 가격으로 100만원을 받았지만 당시로서는 큰 힘이 되었다. 집(전 재산)을 바친 권사님은 갈곳이 없어 파출부라도 가신다고 하셨다. 그일을 알고 교회는 교회 구내 단칸 가건물(건축 공사 때문에 인부들이 있던 집)에 권사님을 모시기로 하고 잡수시는 쌀은 대드리기로 하고 불편하지만 용서하시고 계시도록 했다. 그러난 70 이나 되신 권사님은 언제 세상을 떠날지도 몰라서 교회는 평생 명예권사님으로 추대하고 교회구내서 같이 지내시던중 1971년 1월 발병하셔서 22일 오전 7시 평생 원하시던 주님 앞으로 가셨다. 25일 10시 교회장으로 온 교우가 교회에 모여 친족은 한 사람도 없어도 장례식만은 성대히 치르셨다. 그 식순을 다 소개하지 못해도 교회를 대표한 추모사를 김경숙권사님께서 하셨는데 그 결문에 " 이른 봄 한식(寒植)때와, 달밝은 추석이 되면 성묘하러 가오리다. 고이 잠드소서"로 마치셨다. 나는 그 글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기억한다, 뿐만 아니라 성묘 못감을 죄송하게 생각하며 이 글을 쓸때에도 목욕하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경건한 자세로 이글을 썼다. - 1989년 교회창립 40주년 기념에 생각나는 권사님께 - 김 성 억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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