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금호교회 창립 60주년'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시작을 하여야 하나 걱정하던중에... 김구선생님께서 세운 '백범학원'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http://blog.naver.com/kgys?Redirect=Log&logNo=30000799328"에 사진이 있었습니다. 1949년 1월27일 '백범학원 개원시전 기념사진이... 1949년 2월13일 교회가 창립되였으니 백볌학원개원하고 17일 만에 금호교회가 백범학원에서 창립예배를 드리게된것이지요. 구하고 찾으며 문을 두드리라는 말씀에 감사를 드립니다.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의 금호동 모습이나 김구주택등의 사진이 있으신분들의 연락을... 금호공민학교 사진도... 기도해 주시고... 도와 주세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금호교회의 설립 배경은 이렇습니다. 금호교회의 설립 배경 및 현황 "금호교회의 연령별 잃은 양 찾기를 통한 교회성장 전략"/풀러 신학대학원 이화영 목사 논문집에서... 금호교회는 서울시 성동구 금호동4가 548-2 백범학원에서 이응화 목사와 이무호 목사 인도 하에 13명의 교우가 모여 예배를 드림으로 설립되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원하는 주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 선교하고, 교육하고, 봉사하며, 교제하는 주님의 몸된 교회이다. 이제 하나님이 원하시는 미래 사역을 준비하기 위하여 금호교회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바라본다. 1. 금호교회의 설립배경 한국이 일본제국의 쇠사슬에서 해방이 되고 약 4년이 지나서 북위 38도선을 중심으로 남북의 정권이 수립되고 북한 정권에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신자들과 우익 진영의 사람들이 월남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서울의 변두리 금호동에도 피난민들이 속속 몰려들었다. 그래서 피난민들의 판자 집들이 줄기차게 늘어섰고, 미국 서부개척 시대를 연상케 할 만큼 거칠고 어두웠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 주석으로 계셨던 김구(金九 )선생이 난민을 위해서 이곳에 판자 집을 수 백 칸 짓고 난민들을 수용해 주고, 학교에도 못 가고 거리에 떠도는 아동들을 위해 백범학원(白凡學院)까지 임시교실을 만들어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렇게 난민들이 모여드니 그 중에는 신자들도 있었다. 그래서 금호동에도 교회를 세우자는 목소리는 많았지만 누구도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102) 1949년 2월13일 주일에, 영락교회103)의 전도목사로 봉사하던 이응화 목사가 친구인 이무호 목사와 함께 금호동에 백범학원 교실을 빌려서 교우 13명과 처음으로 역사적인 예배를 드린 것이 금호교회의 시작이다. 어렵게 시작된 교회는 날로 성장해서 300명이 넘는 교회로 늘어났고, 사택 13평과 교회 25평 건물을 천막으로 세웠다. 그리고 지금의 교회 위치로 가져올 수 있게 되었다. 피난민들이 늘면서 교인들도 늘어났고 교회가 성장해 갈 무렵, 6.25 사변이 터졌다. 교인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교회도 당분간 공백기가 되어 버렸다. 1951년 1.1후퇴가 휘몰아치고 맥아더 장군의 9.28진격이 시작된 후 서울도 회복이 되었다. 그래서 교인들도 모여오게 되어서 교회 자리에 다시 천막을 치고 신학생들이 오가며 예배를 시작했다. 그리하여 최지화 (조사)전도사가 오게 되었고 교회를 키워나가기 시작했으며, 권세열(퀸슬러)박사가 설립한 대한 청소년 성경 구락부를 통하여 아동들을 교육하다가 1953년에는 금호공민학교를 설립하였다.104) 1955년에 고현봉 목사가 부임해서 공민학교 교장을 겸임하면서 행정전반의 정리와 교회부흥에 전력하여 많은 성장을 보게 되었다. 그 후 1959년 말 조의택 목사가 부임하여 오게 되어 교회는 계속 부흥되어갔지만 총회가 분립되고105) 노회가 소란할 때 조의택 목사는 결국 금호남부교회로 나가고 1963년 김용수 목사가 부임해 와서 교세도 500명으로 늘고 모든 것이 정리되었으나, 법원 판결에 의해 교회재산(현 혜성수퍼 자리)을 남부교회와 반분하였다.106) ------------------------------------------------------------------------------------------------ 102) 금호교회 40년사 편찬위원회, ‘금호교회 40년사’ (서울 : 금호교회,1989), p106 103) 1949년 당시에는 베다니 교회라라 했다. 104) 금호교회 40년사 편찬위원회,op.cit., p. 107 105) 합동측 장로교회와 통합측 장로교회로 분립되었고, 금호교회는 통합측 장로교회이다. 106) Ibid., p. 108 교회가 어려워진 1967년 상반기에 김성억 목사가 부임해 왔다.107) 그는 먼저 흩어진 교우들을 모으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하였고, 사명감에 불타는 사람들로 만들기 위해 기도로 준비하며 매일 열심히 심방하고, 해이해진 신앙을 일으키고,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나갔다. 그리하여 교회를 떠났던 교우들이 모여들었고 교회를 사랑하는 믿음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새로운 신자들도 날마다 늘어서 새벽기도에 나오는 성도가 줄을 잇고, 금요철야 기도회에 나오는 성도들이 늘어났다. 또한 건축위원회를 조직하여 1968년부터 본격적인 건축이 진행되었다. 교회본당은 목사 사택 이였던 곳(현 본당)에 건평 100평으로 하고, 종각은 4층, 본당 2층도 100평이고, 모자실(3층)30평, 종각,지하 5평, 4층 5평을 합쳐서 총 240평으로 하였다. 그리고 본당 이였던 곳(현 교육관)에 건평70평 2층으로 총 140평의 고등공민학교 교사를 건축하였다. 그래서 교실 한 칸을 20평으로 하고 7개 교실을 만들어1학년 3개 학급, 2학년 3개학급, 3학년 2개 학급으로해서 1970년 말에 문교부로부터 고등공민하교인가를 받았다. 인가 당시 학교직원은 12명이고 학생은 420명이었다.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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