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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여운택 집사님 생각이 나는 아침입니다

천연기념물조병복  /  2021-06-07 20:21:49
故 여운택 집사님 생각이 나는 아침입니다

 

 

제75주년 광복절을 맞으며...
고 여운택 집사님 생각이납니다.
험난했던 세월 속에서...



크기변환_089.jpg


신일본제철 상대 손배소 청구한

징용피해자 여운택 옹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여운택 옹이 24일 오후 서울 강동구 암사동 자택에서 관련 자료를 꺼내 보이며

 이날 대법원 판결 소감을 설명하고 있다.

 여 옹은 일본 법원과 한국 법원을 오가며

 20년 가까이 일본 기업이 피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취지의 소송을 제기해 왔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한(恨)이 풀릴 때까지 눈을 감을 수 없어요.”

24일 서울 강동구 암사동 자택에서 만난 여운택 옹은 대법원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일본 기업이 배상해야 한다’는 취지의 첫 판결을 내렸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도 웃지 못했다. 일본 정부가 그의 피해 사실을 인정한 것은 아직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올해 집나이로 구순(九旬)이 되면서 머리가 어지럽고 몸에 힘도 없다”면서도 “일본이 배상할 때까지 힘을 내겠다”고 말했다.

1923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여 옹은 17세 때 평양의 한 이발소에서 조수로 일했다. 1943년 9월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 그는 월급도 많이 주고 공부도 시켜 준다는 일본 기업의 거짓말에 속아 오사카 일본제철소로 갔다. 그는 “뜨거운 용광로 앞에서 하루 10시간씩 일했지만 하루치 식사를 3일 동안 나눠 먹게 해 늘 굶주렸다”며 “일본인은 야구방망이 크기의 ‘정신봉’으로 우리를 수없이 때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일본인은 매달 담배 2갑 값만 용돈조로 줬다. 기숙사 벽에 한국인 이름과 적금 명세를 표로 그려놓고 “나중에 한꺼번에 찾아갈 수 있다”고 속였다. 그는 “당시 현장에 있던 한국인들은 고국에 두고 온 가족 생각에 고통을 이겨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본이 패전하자 일본 기업인은 도망쳤다.

 
1997년 12월 여 옹은 광복 당시 황소 10마리 값인 460여 엔의 미불임금이 오사카공탁소에 남아 있는 사실을 알고 지급을 요구하는 소송을 일본 오사카지방법원에 냈다. 일본 법원은 한일협정을 이유로 일본 기업의 손을 들어줬다. 한국 법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15년 동안 양국 법정에서 싸우는 사이 많은 동료들이 절망 속에서 죽었다”며 “젊은 세대들이 일본보다 부유한 나라를 만들어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도록 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손해배상 소송을 함께 낸 신천수 옹(86)도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10년 넘게 일본까지 가서 외롭게 싸웠지만 매번 절망했는데 오늘은 말할 수 없이 기쁘다”며 “일본에 끌려가 피해를 본 위안부 여성 등 한국인 모두가 배상받는 날이 빨리 오면 좋겠다”고 말했다.


위 사진 우측에서 두번째분이 여운택 집사님

 

신일본제철 징용 피해자 여운택 안수집사님

 

 

"60년전 황소 6마리 값을

커피 한 잔 값으로 보내오다니..." 


죄없는 조선인 1천도 넘는 용광로 작업에 강제동원

밥값 등 이리저리 공제하고 월급 명세표만 보여줘

 

 

 

돌아보면 부평초 같은 인생이다. 고향인 충남 논산을 떠나 평양에 발을 디딘 건 17살 때다. 일찍 조실부모 하다시피 했고, 가까이 있는 삼촌마저 살림이 풍족하지 못해 의지할 데가 없었다.

고향에서 한 일본인 가게의 점원으로 일하고 있던 도중, 하루는 평양근처 탄광에서 직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공작소에서 일하면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것. 500리가 넘는 머나 먼 길이었지만 마다할 처지가 아니었다.

 

“탄광 기숙사에 가서 보니 거짓말이었요. 사람 얼굴이 아니라 꼭 귀신덩어리 같았죠. 물이 없어서 그런지 꼭 시커먼 숯 덩이리에요.”

 

체구가 큰 사람들부터 차례로 막장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처음 얘기와는 다르지 않느냐며 ‘못 간다’고 완강히 버텼다. 나이도 어린데다 유난히 왜소한 체구 탓일까. ‘아직 공부나 할 아이이지, 너는 탄 못 캔다’. 더 할 말이 없던지 노무과장도 결국 수긍했다. 그렇게 해서 쇠를 녹여 기계를 만드는 일에 배치됐다. 이렇게 평양에 3년여를 있었다.

 

“하루는 신문을 보니 일본제철 대판(오사카)제철소에서 직원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실렸어요. 100명을 모집하는데 2년간 와서 기술을 습득하면 자격증을 주고, 사택도 제공하고, 일본인과 똑 같이 월급도 준다는 거예요. 거기에다 2년이 지나 조선에 나오면 일본제철 사업장에 있는 회사로 기사로 편입까지 시켜 준다니 누가 마다고 해요”

 

그의 나이 스무 살 때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평양에서부터였다. 공장 직원을 모집한다면서 1주일여 간 군복을 주고 군인과 같이 제식훈련을 시켰다. 그는 그 속사정을 일본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1943년 9월 10일이었다.

 

“강도 같은 게 일본이야. 가보니 앞가슴에 징용장을 붙여주더라고. 자유라고는 일절 없고, 순전 노예나 다름없어. 기숙사에 집어넣더니 밥 먹을 때도 잠 잘 때도 군대식 점호를 하고. 만약 눈에 거슬리는 일이 있거나 한 사람이나 잘 못한 일이 있으면 그날은 아주 죽어. 본인이 잘못했다고 나올 때까지 저녁 내내 잠을 안 재우고 곤봉으로 때리고….”

 

그는 석달여의 견습과정을 거쳐 1,000℃가 넘는 용광로를 옆에 두고 기중기를 조작하는 일을 맡았다. 기계를 조작하는 일이었지만 어린 나이에 고된 일이었다.

한편, 일본제철은 여씨가 도착하기 한해 전인 1942년 충북 청주에서 1기로 100명, 1943년 2기 평양지역 100명, 1944년 3기 강원도 지역에서 100명의 노무자들을 차례로 제철소로 끌고 왔다. 처음엔 모집이라는 형식이라도 취했지만 전쟁 막바지인 1944년엔 사실상 강제연행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왜 왔나’하고 한탄하고 통곡해도 소용없었지. 1,000℃가 넘어야 쇠가 녹는데 뜨거운 열에 작업은 고되지, 잠은 못 자지, 먹는 것은 양도 안차지…. 고생 말도 못해.”

 

그 뿐이 아니었다. 노무자들에 대한 감시도 삼엄했다. 그러나 다른 방도가 없었다.

 

“따질 입장이 안 되지. 그렇게 따져 봐야 매 받게 안 와. 도망간 사람 한 둘 있었는데, 잡히면 죽어. 그러니까 아예 도망갈 생각을 안 하지. 잡히면 반은 죽어야 되니까”

 

 

월급이 없진 않았다. 그러나 명목상이었다.

 

“30일 한 달 되면 월급이라고 손에 주는 게 아니야. 지도원이나 감독 너뎃 사람이 숙소로 와서 얼마인지도 모르고 월급봉투만 보여줘. 고향에 자기가 부양하지 않으면 안 될 가족이 있는 경우는 그래도 조금 부쳐준 것 같은데, 독신은 담배 값이나 할 정도 용돈만 주고 강제로 저금을 시켰지”

 

그 마저도 밥값이야 뭐야 이런 저런 명목으로 절반에 가까운 돈은 아예 공제한 금액이었다.

1945년 들어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미군 B-29 폭격기의 출몰이 시작되더니, 급기야 1945년 6월경 폭격에 의해 회사가 거의 전소하다시피 하고 만 것. 연합군의 입장에서 제철소는 제1의 타격 목표였다.

“회사가 다 타버려 더 일할 상황이 못 되자 청진으로 다시 보내더라고. 청진에도 일본제철소가 있었으니까. 해방 직전 소련군이 포를 쏘고 상륙하더라고. 돈 한 푼 못 받고 뿔뿔이 헤어져 산을 타고 걸어 걸어서 서울까지 왔지”

 

공습 부상자에 마취도 없이 톱으로 다리 절단

2004년 연금탈퇴 수당금 신청하자 일본정부 316엔 지급

 

일본제철에서의 끔찍했던 기억은 지금도 뚜렷하다. 2살 남짓 나이 어린 평양 출신 류대근이라는 사람이었다. 일본말로 야나기 다이콩이었는데, 상냥하고 빠릿해 현장 지도원이 굉장히 이쁘게 봐 회사와 기숙사를 오가는 연락병 역할을 삼은 것이다.

 

“그런데 하루는 심부름을 하다가 B-29 육각탄에 허벅지를 맞아 다리가 온통 박살이 나 버렸지. 그때는 전기가 어디 있나? 병원에 갔더니 촛불을 켜 놓고 마취도 않고 위아래 손발을 묶어 쇠톱으로 다리를 썰더라고. ‘어머니, 아버지’ 부르며 통곡하는데 차마 못 보겠더라. 나도 같이 울었지”

 

그러나 결국 그 이튿날 사망하고 말았고, 곧바로 화장터로 보내졌다. 한 동안 잊고 있었던 류씨의 행방을 알게 된 것은 1997년 무렵이었다. 뒤늦게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하던 중 일본을 방문할 때였는데, 어느 절에서 2차 대전 때 죽은 조선인들을 화장한 유골을 보관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것.

 

“그때까지만 해도 대원 중에 이렇게 죽은 사람이 있다고 해도 회사는 아예 부인하더라고. 당시 화장한 절을 찾아 갔더니 그곳에 명단이 있더라고”

 

 

 

재판은 2003년 10월 최고재판소 기각으로 최종 끝나고 말았다. 오랜 재판으로 심신도 지칠대로 지칠 무렵 또 한번 분노케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뒤늦게 후생연금 탈퇴수당금을 신청했더니 2004년 후생노동성에서 316엔을 보내 온 것.

 

“당시 큰 황소 한 마리가 52엔, 53엔 할 때였어. 316엔이면 소 6마리도 사고 남아. 그런데 받아보니 60년전 당시 그 돈으로 보내 온 거야. 이럴 수가 있어. 세상에 소 6마리 값이 다방 커피 한 잔 값도 안 돼 돌아왔는데 말이 되느냐고?”

"포스코, 국민 편인지 일본 편인지 똑바로 해라"

이제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 그러나 여씨는 지금도 분기를 감추지 못했다.

여씨는 현재는 포스코를 상대로 한 시위에 온 몸을 바치고 있다. 지난해 1월부터 서울 강남구 대치동 미쓰비시중공업 한국사무소 앞에서 진행된 금요시위에도 단골 멤버였다. 특히 포스코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포스코는 자신의 청춘을 앗아간 전범기업 신일본제철과 공교롭게도 전략적 제휴를 맺고 있다. 신일본제철의 대주주가 바로 포스코이기도 하다.

 

“신일본체철을 상대로 20여년 동안 싸우고 있어요. 포스코가 대주주로서 조그만 역할이라도 해 달라고 했지만 아예 못 본 척 해요. 그러면서도 일본정부로 받은 청구권 자금은 다 가져다 썼잖아요. 누구 돈입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은 가난하고 약하고 못 배운 사람들이라서 무시해도 된다는 얘기 아닙니까”

 

“포스코가 대한민국 국민 편인지, 아니면 일본 전범기업 편인지 똑바로 해라 이겁니다. 보세요. 다들 팔십 객, 구십 객에 달한 사람들이에요. 시간이 없어요.”

 

해방 65년. 여씨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7월 10일 서울고등법원 배상 판결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일제피해자공제조합>에서 발행한 [일제피해자신문] 준비 6호 4면(2010년 11월 1일자)에 게재 된 것을 다시

올립니다.

일제피해자공제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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