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농사가 주업이면 철원군은 망합네다 전 강원일보 편집부국장 조 규 병 [2015-07-08 오후 2:22:00]
1. 故 황종선 장로 : 지난 95년 80세의 나이로 타계한 황 장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필자에게 벼농사가 부업이 되어야 철원농민은 산다고 일깨워줬던 분이다.
필자 꼭 38년 전 철원에 발령
필자가 철원군 주재기자로 발령을 받은 것은 1977년 7월 1일자였다.
발령과 함께 부임 즉시 철원평야와 벼농사 작황을 특집 기사를 만들어 바로 보내라는 취재 지시가 동시에 떨어졌다. 강원일보 본사에 근무하며 경찰과 농협을 주로 출입해 농사에 대하여는 거의 문외한인데 가자 말자 벼농사 특집을 쓰라니 신경이 쓰이는 취재 지시가 아닐 수 없었다.
특집기사는 일반 사건기사와 달리 전문적인 내용이 포함되어야 하고, 또 농사꾼이나 전문가가 읽어도 동감이 되는 내용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물어물어 군청 농사계 차석인 오관식씨에게 체면불구하고 특집 기사를 쓸 수 있도록 철원평야의 논농사 작황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다음날 오씨가 써다 준 것은 마치 전문 기자가 쓴 것처럼 깔끔하고 내용이 모두 담겨져 있었다. 건네준 것을 그대로 베끼다시피 해서 특집을 겨우 마감했었다.
이때 급한 불을 꺼준 오씨에게는 지금도 고마운 생각을 가지고 있다.
철원에서 근무하자면 특히 벼농사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농촌지도소를 찾아가 벼의 생육 상태에 대하여 열심히 공부를 했다. 활착 분얼 도열병 문고병 입고병 논말리기 등 생소한 단어들을 익히며 벼의 모든 생육과 토질의 비배관리까지 열심히 공부했다.
이 덕분에 2,3개월 후부터는 벼농사 기사를 어느 정도 쓸 수 있게 되었다.
필자와 가까이 지낸 전진농가 배수영 방규학 이수안
또한 오덕리의 배수영사장, 이화농장의 방규학 사장, 화지리의 이수안사장 등 대농들과도 전화로 작황 얘기를 할 정도로 벼농사 전문기자가 되어갔다.
자연히 벼농사에 대한 애착도 높아져 유통판매까지 신경을 쓰며 벼농사에 올인 했다. 필자가 쓴 철원평야의 벼농사 기사는 도지사께서도 꼭 읽어 본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이렇게 가까워진 벼농사와 이별을 해야 하는 참담한 일이 벌어졌다.
필자가 나가는 신철원감리교회에서 철원지방 남선교회 회원들 모임이 있었는데, 그때 처음 만난 향원교회 황종선(黃鍾善·당시 65세쯤)장로가 필자가 벼농사와 멀어지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황 장로는 억센 피안도 사투리로 “집사님이레, 강원일보 기자라 그렛디요?”하고 말을 걸었다.
“언제 한 번 나한테 오시라요”
1주일쯤 지난 후 수소문해서 황장로를 찾아갔다.
황장로는 필자가 방안에 앉자마자 “집사님이 쓴 강원일보를 잘 읽고 있습네다. 그런데 집사님이레, 벼농사꾼이 일 년에 논에 몇 번 나가는 줄 아십네까?”
논농사꾼은 일 년에 겨우 58일 일합네다.
이어 황장로는 자신이 쓴 영농일지를 펴 보이며 “논농사꾼이 논에 나가는 날짜는 58일밖에 안 됩네다.”하고 약간은 신경질적으로 말을 했다.
“그나마 하루 종일 일하는 것은 한 달도 채 안 되디요?”
왜 이 말을 꺼낼까?
“서울 사람들은 365일 1년 내내 일을 합네다. 그런데 논농사를 주로 하는 우리 철원사람들은 두 달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서울 사람과 같이 잘살겠고 합네다. 두 달도 안 되는 일을 하고 1년 일하는 사람처럼 살려고 생각하면 그 놈은 도둑놈이디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가 되는 듯싶었다.
필자는 벼농사 기사를 쓸 때는 으레 「철원평야의 주업(主業)인 벼농사가」 하며 주업이란 말을 즐겨 썼는데 이 부분이 황장로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든 모양이다.
이날 이후 필자는 생각을 완전히 달리했다. 주업인 벼농사는 부업이 되고 다른 주업을 찾자.
그래서 찾아 나선 것이 갈말읍 내대리 이대섭씨의 느타리버섯 단지, 문혜5리 김호연씨의 임간방목장, 김춘식씨의 땅두릅 농장, 동송의 김원준씨 멜런 단지 등 주업이 될 만한 곳을 찾아 동분서주 하며 대서특필했다.
2. 임간방목으로 문혜5리 전체에 가난을 물리치겠다고 두 주먹을 불끈 쥐던 김호연 전 군수의 젊었을 때의 모습 (강원일보 1982년 11월 15일자 보도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