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 요11:35 -
셋째로 우리가 흘려야 하는 눈물은 나라와 민족을 위한 눈물이다.
영원한 청년 시인 윤동주는 기독교에 관한 시도 여러 편을 남겼다. 운동주의 ‘팔복’ 이라는 시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렇게 여덟 번을 반복한 시인은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이 시는 1940년 12월에 쓴 시입니다. 조선에 대한 일제의 병탄과 강제 동원, 폭압 정치가 극심했던 때입니다.
어떤 기대나 어떤 희망도 말할 수 없을 때 윤동주는 나라를 위해 슬퍼하는 자가 복이 있다. 민족을 위해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끊임없이 되 뇌이며 울었다.
그들은 이렇게 울었다 조국과 민족을 앞날을 위해서 울었다 도산 안창호도 울었고 백범 김구도 눈물을 훔쳤고 윤동주도 울었고 추양 한경직 목사님도 울었다.
기독교 신문에 났던 한경직 목사님의 이야기다 한경직 목사님은 한 평생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다. 자기의 허물과 함께 민족의 비극을 가슴 아파했기 때문이었다. 한 목사님은 1960년 1월 10일에 행한 "애통하는 자와 그 복" 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울고 또 울었다. 여러분, 조용히 귀를 기울여서 우리 사회의 울음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자녀를 잃은 부모들의 울음 소리, 부모를 잃은 고아들의 울음소리, 남편을 잃은 아내들의 울음소리, 실업자의 울음소리, 고학생들의 울음소리, 순진한 여성들이 악인의 유혹을 받아서 일생을 그르친 가련한 여성들의 울음소리,
이 울음 소리를 듣고 같이 애통하는 자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됩니까? 애통할 줄 모르는 사회입니다. 남의 눈물을 내 눈물로 알고 남의 설움을 내 설움으로 알아서 같이 십자가를 질줄 아는 민족만이 복을 받느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 이제 오늘의 조국을 위해서는 누가 울어야 하는가? 얼마 전 이런 기사를 읽었다
“오늘 한국 교회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우리의 눈물에 있다”
여기의 우리는 누군가? 여기의 우리는 목사, 장로, 성도들이다.
한국교회 영적리더쉽 포럼에서 감신대 이덕주 교수는 위기다. 한국교회의 위기다. 그러나 대안 없는 비판은 하지 마라.
대안은 뭐냐? 대안은 눈물이다 대안은 기도의 눈물이라며 1903년 원산과 1907년 평양부흥운동이 다시 일어나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면 교회만 위기인가? 아니다. 나라도 위기다
유엔 산하 자문기구인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가 며칠 전에(21일) 공개한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행복지수 10점 만점에 5.895점을 받아 54위를 기록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어섰다는 데도 빈부의 격차는 더 벌어지고 국민들의 행복도는 중· 또는 후진국 수준에 머물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가 잘 하는 것도 많다 기대 수명이 세계 9위, 1인당 국민소득은 세계 27위다.
그러나 자살률과 노인 빈곤율은 1위이고 출산율 역시 세계 꼴찌다. 이런 면에서 위기라는 것이다.
느헤미야는 고국의 소식을 듣고 울었다 그러나 울기만 하지 않았다 기도했다 기도하고 행동했다 결국 느헤미야의 눈물이 나라를 살렸다 민족의 역사를 바꾸었다.
나라의 흥망성쇠가 하나님과 우리의 눈물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눈물은 그저 흘려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그냥 떠내려 보내는 것이 아니다. 이해인 시인은 눈물이 꽃이 된다고 했다. 눈물병에 담겨 하나님께 올라간다는 것이다.
잘 울었을 때, 그 눈물은 꽃이 된다. 잘 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골방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우는 것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우는 것이다.
꽃만 되는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된다. 성령의 열매가 된다. 하늘의 양식이 된다. 양분이 된다.
나를 살리는 양수가 되고 남을 살리는 양식이 되고 나라를 살리는 양분이 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열매가 된다. 예수님의 골방의 눈물로 하나님 나라의 꽃밭을 이루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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